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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묵상] 야고보서3:13-18절 매일성경묵상

여러분 가운데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13절)

하늘로부터 내려온 지혜와 땅에 속한 지혜가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땅에 속한 지혜는 육신과 악마에 속한 지혜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반면에 땅에 속한 지혜는 시기심과 경쟁심이 주된 특징이고, 온갖 혼란과 악한 행위가 있다.

만약에 어떤 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착한 행동으로 인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 위에서 내려온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그의 삶이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인한 열매라면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도 속는 것이다.

참된 지혜는, 그 어떤 명분의 시기심과 경쟁심을 배제한다. 간혹 어떤 이들은 선한 시기심과 선한 의도의 경쟁심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선한 의도의 살인은 정당하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시기심과 경쟁심은 악마에게 속한 것이다. 거룩한 경쟁, 혹은 거룩한 시기심은 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주의 일을 경쟁심과 시기심으로 하는 것도 악마에게 속한 것이다.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운순하고 자비라는 열매는 맺을 수 없다. 이런 성품과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무장된 성품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선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만들어 낼 인격과 성품이 어떠하겠는가? 일은 잘 될지 몰라도 성품은 피폐해지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조심하자. 시기심과 경쟁심이 없다는 것이 무기력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은 시기심과 경쟁심을 동력으로 삼기 때문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없어지면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동력이 있기에 시기심과 경쟁심을 동력으로 삼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경쟁심과 시기심이 없는 신자의 삶은 활기차고 즐거운 삶이다.


적용 - 오늘 하루 종일 무용치료(춤치료) 수업을 한다. 여러 명이 작업을 하는 것인데, 이 작업에서는 그 어떤 경쟁심이나 시기심이 있을 것이 없다. 시기심과 경쟁심이 없는 모임에서의 즐거움을 누리기.
교회의 모임에서 혹시라도 시기심과 경쟁심을 유도하거나 촉진하는 행위를 내가 하지 않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기.





[야고보서 묵상] 야고보서3:1-12절 매일성경묵상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됩니다.(1절)

몸의 지체중에서 연약한 것중의 하나는 '혀'이다. 그런데 거대한 배를 아주 작은 키가 조종하는 큰 일을 하듯이, 혀도 몸을 조정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다. '혀'가 하는 것은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평가할 때, 여러가지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말'을 하다보면, '말'을 듣다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알수 있다.

특히 공동체에서 '말'을 주로 사용하는 지도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책임이 큰 만큼 그 댓가도 엄중할 것이다. 가급적 지도자가 되지 않는 것이 좋다. 설교나 성경강해등을 하는 지도자가 그것에 대해 잘못하면 그 파장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말해야 한다. 제일 좋은 것은 지도자가 되지 않는 것이고, 부득불 '말'을 하는 지도자가 되었다면, 가급적 '말'을 하지 말고 듣는데 애를 써야 한다. 말이 많고 말에 실수가 많은 것을 통제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듣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8절)

말을 다스리고 혀를 제어하는 것은 지도자의 몫만은 아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말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굉장이 큰 숲이 불에 타는 것도 아주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듯이 인생의 큰 불행도 아주 작은 '말(혀)'에서 시작된다.

말은 '길들여야 할 대상'이다.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길들여야 한다. 즉 부단한 훈련과 연습을 통해 '말(혀)'를 길들여야 한다. 말(혀)를 길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저절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 된다.

어떻게 혀를 다스릴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동, 즉 혀로 하는 행동(말)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오고, 한 샘물에서 단 물과 쓴 물이 동시에 나오는 모순된 상황을 직면하고,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아는 것,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이 혀를 다스리는 첫번째 방법이다.

결국, 자신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대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말을 한다. 자신이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미움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이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는지, 말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지를 알아차리는 것, 즉 자신이 말할 때 말하는 자신을 볼 줄 알 때 '말'은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적용 - 말하기보다 듣기.(어제 저녁에 40대 중반의 남성과 상담을 끝내고 나서 뭔가 개운치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말씀 묵상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 내가 듣기보다는 말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누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잘 안된다. 반성.)
오늘 하루 지내면서 말하는 나를 알아차리기. 말하는 나를 의식해보기. 내가 말을 하면서 그 말을 나도 들어보기. (연습)


[야고보서 묵상] 야고보서2:14-26절 매일성경묵상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6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즉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행함에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말로만의 믿음'이다.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 말이 행함으로 연결될 때 그 말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날 때 그 믿음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믿음은 단지 아는 것, 혹은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라는 것을 알거나 인정하는 것이 믿음은 아니다. 그렇게 아는 것, 인정하는 것이 그의 삶을 만들어나갈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믿음이 행함이고 행함이 믿음이다. 믿음은 다른 말로 하면 '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적용 - 마음을 먹었다고 만족하는 것은 없는지, 누군가를 생각하고 기억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소위 '기도'가 행함을 면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지는 않는지, 즉 행하기 싫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오늘 누군가 생각나고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실천하겠다. (이것도 말로만 그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야고보서 묵상] 야고보서 2:1-13 매일성경묵상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1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돈, 입고 있는 옷, 자동차 종류, 차려입은 행색등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 이웃에는 부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차별해서 대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사람처럼 대하기를 원한다.

이 말씀에 구구절절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지금은 이론이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차별을 내가 하고는 있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교우들을 차별하지 않고, 혹은 일부 교우들을 업신여기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뚜렷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모두를 공평하게 존중하며 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는 소홀히 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주님께 용서를 구해야겠다. 그리고 정신 바짝 차리고, 즉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12절) 이웃들을 대해야 겠다.

적용 - 어제 저녁에 수요모임에 참석하는 분이 전화를 했다. 신천지에 빠진 청년이 있는데, 수요 성경 공부 모임에 데리고 오겠다고 한다. 공부 후에 상담을 해주었으면 하길래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약간은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4시에 하는 좌담회 준비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청년과의 만남이 부담이 되었는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부담감을 털어 버렸다. 신천지라는 이상한 집단에 빠져서 이제 갓 빠져 나온 가련한 청년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내게 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그 청년이 오늘 수요 모임에 온다면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고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야고보서 묵상] 야고보서1:19-27 매일성경묵상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하십시오.(19절)

인내가 없거나 부족하면 잘 듣지 않게 되고, 빨리 말하게 되고, 급히 노하게 된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데, 이처럼 인내의 열매는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특히, 인내가 없으면 노하기를 쉽게 한다. 자극만 조금 받아도 쉽게 화를 벌컥 낸다거나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다. 나중에 뻔히 후회할 것을 알면서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부리는 것도 노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인내'와 '억압(무조건 참는 것)'은 다르다. '인내'은 '믿음의 시련'으로 맺게 되는 열매이지, 무조건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면서 억누르는 것은 아니다. 억누르면(억압하면) 반드시 다른 것으로 삐져나오게 되어 있다. 화를 억압하면 짜증으로 삐져 나오고, 짜증도 억압하면 몸이 아프고... 인내는 성품이지 억지로 누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인내는 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노하기를 더디할 수 있을까? 말하기는 더디하고 듣기는 빨리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안에 심어주신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가 '듣는' 말씀이다. 설교를 듣던, 성경을 공부하던, 묵상을 하던지 간에 '듣는' 말씀이다. 이 '듣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인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 '듣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배격하는 죄악에서 떠나야 한다. 그 자리에서 여전히 머물면서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22절)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21절) 곧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라는 말은 곧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행하십시오'라는 말과 같다.

말씀은 완전한 율법이다. 완전한 율법은 속박하거나 얽어매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율법이다. 심리적으로도 자유로운 사람일수록 기본 가치관이 확고하고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확고하고 분명하게 말씀에 서 있으면 그 말씀은 우리를 묶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한다. 예수처럼 자유로운 분이 세상에 어디에 있었던가.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살아야 한다. 즉 신중해야 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어쩌다 하는 것이 아니다. 급하게 결정내리는 것도 아니다. 변덕스럽게 오늘과 내일이 다른 것도 아니다. 말씀을 실행한다는 것은 1회적인 일이 아니라 평생 지속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품의 문제이지 단지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는 아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지속성, 일관성, 신중함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열매, 성품의 문제이다.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26절)

경건한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거나 자기 마음을 속이면서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즉 경건한 사람의 특징은 '말을 그럴듯 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 입에서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진 종교적 언어가 나온다고 해서 경건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 경건은 세상과 가급적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경건이다. 그러므로 경건을 위해서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은 이방종교 풍습이지 복음의 가르침은 아니다.

사람은 홀로 살 때 깨끗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 때 깨끗해진다. 특히 고아와 과부등의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 때 그 영혼은 해맑게 깨끗해진다. 이것이 경건이다.


적용 - 내일 좌담회에서 듣기 빨리 하고 말은 매우 더디하기. 가급적 침묵하기. 오늘 하루 온유한 마음을 억지로라도 가져보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생각해서 실천하기.

[야고보서 묵상] 1:12-18 매일성경묵상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12절)

시험을 잘 견디는 것으로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된다. 시험이 없으면 그의 신앙이 참된 신앙인지 알수가 없다. 시험을 통해 그가 고백하는 신앙의 참됨이 입증된다. 시험을 당하기 전에는 자신 조차도 자신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모른다. 시험을 겪어 보아야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기에 '시험'은 그것을 잘 견디고 극복하는 것 못지 않게 시험을 '겪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험이 없으면 나도 나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13절)

어떤 시험은 내 욕심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유혹이다. 아마 대개의 시험은 이럴 것이다. 욕심이 없었다면 받지 않았을 시험들이 무수히 많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게 유혹하지 않는다. 함정을 파놓고 호리지 않는다. 유혹에 빠진 것을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더욱 가리는 일이다.

이런 류의 시험은 불쾌할 뿐이다. 이런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을 버리는 것, 이 또한 '시험(시련)'을 잘 견디는 것이다.

또 하나,  '시련'만 나를 성숙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 때문에 직면하게 된 '유혹'도 그것을 잘 극복하면 나를 성숙시키는 수단이 된다. 내 욕심 때문에 생기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 또한 잘만 극복한다면 유익되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18절)

'속다'는 길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욕심 때문에 시험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면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찾게된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지혜(진리의 말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신자의 태생적 운명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아주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양식은 진리의 말씀이어야 하고, 이 말씀 안에 거해야 속지 않을 수 있다.


적용 - 내게 어떤 욕심이 있는지 살펴본다. 진리의 말씀이 나를 사로 잡을 수 있도록 그 말씀 앞에 무릎꿇는다.

[야고보서 묵상] 야고보서1:1-11 매일성경묵상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1절)

특정 지역 교회가 아니라 온 세계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낸다. 이 서신은 소위 '보편적' 서신이다.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2절)

시험(믿음의 시련)이 없으면 인내가 없으며, 인내가 없으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험(믿음의 시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자 택일,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믿음의 시련을 기쁘게 감당하던가, 아니면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시련을 거부하던가.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5절)

'시험(믿음의 시련)'을 이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지위? 재물? 지식? 능력? 인맥? 학력? 아니다. '지혜'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즉 세상의 처세술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만 알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에 조금만 하나님이 채워준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한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이 지혜를 구할 때는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즉 세상에 한 발을 걸쳐 놓고 구해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의 첫 시작은 하나님에게 온전히 발을 담그는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오직 주님에게만 한 마음을 품고 구하는 것이 지혜를 얻는 첫 걸음이라는 것, 분명하게 인식한다.

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9절)

지혜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보이는 모습대로 세상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판단하는 기준대로 세상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하여 세상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지혜이다. 그래서 세상의 부자들에게서 비참함을 보고, 비천한 신자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보는 것이 지혜이다. 영원할 것 같은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며,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것 같은 세상의 모습이 곧 시들어질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가 나에게 얼마나 충만한지 돌아본다.


[유다서 묵상] 유다서1:1-25 매일성경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장 거룩한 여러분의 믿음을 터로 삼아서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십시오.(20절)

혼탁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면서 타인을 돌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돌보다가 빠질 수도 있고, 그렇다고 빠지는 것이 두려워 돌보지 않을 수도 없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선 믿음을 터로 삼아서 자기를 건축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면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 자기를 건축하는 것, 자기를 지키는 것... 자신을 믿음과 기도로 돌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일 몸을 씻듯이 영혼을 씻는 작업이 필요하겠다. 말씀 묵상이 그러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해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지, 동정하되 물들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지... 내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안심이 되는 것은,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시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의 영광 앞에 기쁘게 나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우리 구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여러분을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의 영광 앞에 기쁘게 나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 곧 우리의 구주이시며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주권과 권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와 이제와 영원까지 있기를 빕니다. 아멘.(24-25절)


[유다서 묵상] 유다서1:1-16 매일성경묵상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시는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1절)

유다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시는 교회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이 교회는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주님이 지켜주신다고 하여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다는 교회를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여 이 편지를 쓴다.

이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몰래 들어왔다. 유다는 이들을 '경건하지 못한 자들, 불경건한 행실을 하는 자들'로 묘사한다. 이들의 운명은 옛 심판이 증거하는 것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들의 운명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처럼 될 것이다.

유다는 이들에 대해 교리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유다가 이들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점은 이들의 행실이다. 물론 이들의 교리도 상당히 잘못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잘못된 교리가 잘못된 행실을 낳는다는 식으로, 이들의 부정한 행실을 드러내면서 결과적으로 이들의 교리도 잘못되었음을 폭로한다.

이들의 특징은 이렇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거리로 만들고,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업신여기며,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욕을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고, 가인처럼 시기와 질투를 하고, 발람처럼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고, 공동체를 배려하기보다는 자기 뱃속만 채우려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불만에 쌓여서 불평을 늘어놓고, 자기들의 욕심대로 살고, 허풍을 떨며, 이익 앞에서는 아첨도 불사하는 자들이다.

성품과 행실이 그의 교리를 증명한다.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유다서에서도 확인된다.

내 성품이 어떤지, 내 행실이 어떤지 유다의 편지를 통해 살펴본다.


[빌레몬서 묵상] 빌레몬서1:17-25 매일성경묵상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호의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20절)

아마도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심지어 빌레몬에게 재산상의 손해도 상당히 끼친 것으로 보인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만, 빌레몬이 그에 대해 매우 실망하였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오네시모는 자신의 잘못을 상당히 뉘우친 것 같다. 바울 곁에 있으면서 말씀으로 단련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판단을 한 듯 하다. 그러기에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것을 빌레몬에게 설득한다.

바울의 설득은 집요하다. 오네시모를 자신과 같은 동지로 맞이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오네시모가 진 빚을 갚아주겠다고 한다. 사실 그럴만한 돈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서은근히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졌듯이 빌레몬 역시 바울에게 빚이 있음을 언급한다. 즉 빚을 탕감해 달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빌레몬이 충분히 그런 호의를 베풀 수 있음을 미리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숙소를 마련해 달라고 한다. 즉 오네시모를 보내고 나서 나중에 방문해서 오네시모를 잘 받아주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빌레몬이 꼼짝없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한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하거나 위압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빌레몬의 인격과 선택권을 존중해주면서 충분한 설득을 한다. 이 정도 설득이면 그 누구도 기분나쁘지 않게 설득에 넘어갈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도 나를 이렇게 설득하셔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신 것은 아닐까.

사람을 설득하는 것, 이렇게 집요하고 세심한 과정이다. 이런 과정이 귀찮아서 명령하거나 한 두마디 권면하고 나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우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나는 어떻게 하는지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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